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의 북벌 (문단 편집) === 3차 북벌(229년) === 어쩌면 제갈량의 북벌 중 가장 큰 이득을 보았던 북벌이다. 229년 봄[* 시기상으로 '''2차 북벌 직후'''다. 두 가지 군사 활동이 연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삼덕은 2 ~ 4차 북벌, 위의 촉 공격 시도를 큰 틀에서 하나로 묶어서 본다.], 제갈량은 진식을 보내어 음평과 무도 2군을 접수하게 한다. 진창 공방전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으나, 앞서 진창성의 방어전을 지휘한 학소는 수도에 올라갔다가 병사했고, 장합은 장합대로 남북군을 오랫동안 수도에서 비워둘 수 없는 입장이었으니 이미 회군하고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곽회가 진식을 공격하려 했으나 진식에 뒤이어 퇴각했던 제갈량의 군대까지 건위(建威)로 진출하여 위군을 압박하자 전황은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결국 곽회가 퇴환(退還)[* 제갈량전 후주의 조서에선 둔주(遁走)케 했다고 표현한다.]하여 2군이 평정되었다. 장기전을 보면 [[한중공방전]] 이후 조조가 사민 정책으로 무도 일대의 저족 5만 명을 천수, 부풍 일대로 이주시켰는데 후한 시절에도 무도군 인구는 8만에 불과했는데 이 시기에 5만을 빼냈다는 건 아예 텅텅 빈 상태. 양부전에 의하면 백성들만 이주시킨 것이 아니라 군청까지 옮겨버렸으므로, 결국 관민이 모두 빠져나갔다는 얘기다. 따라서 무도, 음평의 점령은 인구적으로 커다란 수확이 있었다고 보긴 힘들고, 지리적인 측면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가정 전투의 허물은 마속에게서 비롯된 것이나, 그대는 이를 자신의 허물로 돌려 스스로 심히 폄하하고 몸을 굽히니 그대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워 그 청을 들어주었다. 지난해에 왕사를 빛내 왕쌍을 참수하고, 올해도 정벌하여 곽회를 도망케 했다. 저족과 강족을 위무하고 두 군을 회복했으며 위엄은 흉포한 무리를 제압하니, 그 공훈이 현연(顯然)하도다. > >지금 바야흐로 천하가 소란스럽고 원악(元惡)이 아직 효수되지 않았는데, 그대는 대임을 맡은 나라의 기둥이니 오래도록 스스로 겸손하는 것은 공업을 크게 세우는 길이 못 된다. 이제 다시 그대를 승상으로 삼으니 사양하지 말라. 제갈량전의 후주 조서에서는 2, 3차 북벌을 두고 ''' '저, 강을 위무했다.' ''' 고 평하는데, 실제로 무제기의 장로 정벌 파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제갈량이 거쳐간 산관-진창도는 물론, 무도와 음평은 본디 저족의 터전[* 과거 오란이 음평으로 퇴각했을 때, 그의 목을 베어바친 자가 바로 음평의 저족 강단이었다.]이었고, 특히 음평은 양주와 접하는데, 양주는 [[강족]]의 보금자리였다. 여기서 장기와 양부가 두 차례에 걸쳐서 옮겨간 저족들은 어디 멀리 간 것이 아니라 모두 부풍-천수의 경내 혹은 경계 지역에 살았고, 무도는 다름아닌 천수와 직통으로 접한 지역이다. 따라서 무도가 촉에 넘어갈 경우, 자연히 천수 경내에 잔존하던 저족들이 영향을 받기 쉽고, 이는 실제로 1차 북벌에서 출격 한번에 천수, 안정은 물론 관중 지역까지 한꺼번에 준동한 점, 그리고 4차 북벌에서 장합이 기산의 민심을 우려한 기록으로 모두 증명되고 있다. 더 나아가 강유의 대에 이르게 되면, 음평을 통해 농서, 남안, 금성의 강족을 이용해 함께 북벌을 시도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제갈량의 대에서도 위연과 오의가 음평의 강중(姜中)을 통해 양계(농서), 남안을 기습하여 4차 북벌의 사전 작업을 해놓은 기록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당시 진서 사마부전의 기록을 보면, 계속된 제갈량의 침공으로 군량이 부족했다고 기록하는데, 등애전엔 농서와 남안을 두고 '강족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는 곳'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위연과 오의의 기습 목적을 군량 탈취로 보는 시각도 있다.] 무엇보다도 위가 중간 지대인 무도와 음평을 내주면 천수와 농서가 촉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는 반면, 위가 이 지역들을 점령하고 있을 경우 굳이 답중이나 건위를 경유할 필요 없이 바로 '''하변을 통한 한중 진공 + 교두를 통한 검각 진공'''이 가능하다는 차이가 있다. 263년의 제3차 촉정에서도 강유가 진언한 것은 바로 음평의 교두 방어책이었고, 유선의 판단 미스로 그 대비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위군은 한달간 음평에 묶여 있었다. 게다가 무도는 북벌군의 배후인 진창도가 위치하는 지역으로서, 이 지역을 점령하고 있을 경우엔 1차 북벌처럼 위진이 제안한 촉군의 후방 보급로 기습이 가능하지만, 이를 상실할 경우 그게 불가능해지며, 실제로 촉군이 무도를 점령한 229년 이후 전개된 그 어떤 북벌에서도 위군은 촉군의 후방 보급로를 공격할 수 없었다. 즉, 진식의 무도 공격 때 옹주자사 곽회가 기민하게 대처한 것도, 조진이 자극을 받아 촉정을 기획한 것도 상기한 위험성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1차 북벌 당시 촉군이 무도를 씹고 진공할 수 있었던 것은 위략의 서술처럼 그게 '''기습'''이었기 때문일 뿐, 3차 북벌에서 진식이 무도를 침공하자 곽회는 이를 즉각 요격했으며, 제갈량이 오기 전까지 형세는 결정되지 않았고 그 이상의 진군도 불가능했다. 2차, 3차를 이어서 보면 조운 정도의 역량이 되는 군을 나누어 통솔할 사람이 없거나 군대가 모자라거나 등의 이유로 진창을 공격하고(진창도 점령), 무도/음평을 뽑아오고(진창도, 기산도, 더 서쪽에서 오는 길목) 다시 상규 공략(4차)를 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갈량의 북벌의 큰 줄기는 1차-4차-5차의 3번의 북벌이고, 4차를 위해서 2/3차를 했다고 보는 것이다. 소결하자면 3차 북벌의 무도-음평 점령의 의의는 이민족에 대한 공작 용이 + 공격/방어 루트 확보 + 보급선의 안정적 확보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물론 대외적인 성과뿐 아니라 촉 내부적으로도 의미가 있어 무도, 음평의 평정과 왕쌍의 사살을 명분으로 제갈량이 다시 승상직에 복귀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